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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삶의 이야기

서문 5년 전 독일에 건너와 2년간의 석사과정과 1년간의 체코 필하모니의 아카데미 단원 활동 이후 2023년 여름, 내가 현재 종신 단원으로 근무 중인 도시인 졸링엔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우연히 정착하게 된 근처의 도시는 부퍼탈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대부분이 파괴 되었던 이 도시는 전쟁 이후 재건 되어 현대적인 건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내가 사는 이 부근 만큼은 폭격에 의한 피해가 비교적 적었기에 역사와 오랜 생활이 지켜진 아름다움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적절한 연습실을 찾는 것은 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첫번째 관문이었다. 곧 동료의 추천으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Brillerstraße 거리에 어떤 건물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국가 공인 피아노 교육자인 Anke Lingel 선생님이 거주하며 레슨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집의 방 한칸을 연습실로서 계약하게 되었고 어느덧 2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그녀와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나는 그녀의 지혜와 철학을 답습할 수 있었다. 음악가로써, 교육자로써 그녀의 현안을 나눠보고자 한다.
85년의 삶 중 50년 동안 피아노 교육자로 살아온 그녀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선생님이라 하면 음악가를 희망하는 어린 전공자 또는 대학의 교강사를 일컫는 것으로 상상할테지만 그녀는 전공자는 물론이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아노를 통해 삶을 공유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자였다. 그녀가 이 일을 50년 동안 지속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며 행복한 인상을 띠는 동기가 궁금했다. 나아가 그녀의 인생, 그리고 그 속에 깃든 교육 철학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경험과 지혜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조심스레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녀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선생님의 레슨실 사진 정원철
어둠 속 독일, 그리고 나의 유년기 속에 피어난 음악이라는 작은 희망
Q. 거의 한세기를 살아온 선생님은 어떤 젊은 시절이 있었나요?
나는 한창 세계 2차대전이 개전되고 있던 독일 북부의 Wittensee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우리 가족은 항상 가난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어머니와 나는 밤마다 몰래 남의 닭을 훔치러 다닐 정도로 생계가 곤란했습니다.
영원한 지옥 같은 전쟁이 끝나고 나치 SS 부대에 병사였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무엇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우리에게 매우 폭력적이었고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나는 10살이 되지 않은 나이었습니다. 70년도 더 된 과거지만 그 때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은 지금도 생생해요. 늘 두통에 시달렸었죠.
나를 그런 환경에 둘 수 없었던 어머니는 옆 동네에 발도르프 학교(Waldorfschule)라는 학교에 보냈어요. 그 곳은 정말 나에게 집 같은 곳이었습니다. 정신적인 피난처였어요. 그 곳에서는 음악이 다른 주요한 과목들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가르쳐졌고 나는 특별히 음악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행복감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난 가끔 우울감에 수업 중에 울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날 나무라지 않았으며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그 곳이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곳 이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것은 날 위로했고 삶이라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했습니다.
음악이 심어준 희망, 교육으로 꽃피다.
Q. 음악 교육자의 길은 어떻게 시작 되었나요?
그렇게 교육 속에서 나는 다시 자라났고 회복 되는 와중에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 네가 음악 공부를 할 자질이 있는지 시험 해보는건 어때?' 그게 나의 시작이었어요. 선생님은 내 재능을 알아봐주셨고 입학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부퍼탈 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학업을 중단 했죠.
그로부터 몇년 후 나의 어머니는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이 집을 사서 하숙집으로 운영했답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의 일을 도왔어요.
선생님의 서재 사진 정원철
내 아들이 네 살이 되었을 때 쯤이었죠. 내 아들도 나에게 간단히 피아노를 배우곤 했었는데 너무나 축복이게도 내 아들도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어요. 그래서 난 선생님을 찾았죠. 내 아들의 선생님은 당시에 청소년 음악학교에 계셨고 그녀는 제자들을 훌륭히 키워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선생님은 아이의 부모 중 한 명이 반드시 수업에 동참하라는 지침이 있었습니다.
그덕에 나도 매주 두 번, 함께 앉아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음악교육에 동참했어요. 어느날 선생님이 나를 관찰하다 이렇게 말했어요. “안케, 당신은 교육에 정말 재능이 있어요. 음악 다시 시작하셔야 해요.”
다시 공부를 시작 할 때는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도 많고 신경 써야 하는 것들도 많았던 나는 선생님께 "문제 일으키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것"이라는 서약서를 썼어야 했죠. 하지만 나는 열심이었고, 중간시험도 면제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어요. 저는 프로 연주자가 되지는 않았고 집에서 재능있는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엄청 잘되었답니다. 늘 대기자가 있었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리가 넘쳐나곤 했죠.
2부에 계속.
글 정원철 / 편집 이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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