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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리고 시인의 몫 part.1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블랑딘이라는 아이까지 가지게 된 1835년의 리스트는 앞으로 떠들썩해질 염문을 피해 파리를 벗어나 스위스로 향한다. 뒤이어 1837년부터 이어진 몇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은 리스트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왔다. 리스트는 사랑하는 연인 마리 다구와 함께였으며, 두번째 딸 코지마와 첫 아들 다니엘을 얻었다. 또한 단테의 <신곡>과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등 이탈리아의 문학 작품과 다양한 오페라, 그리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리 등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을 접하며 리스트 자신도 창작열을 불태웠다.
리스트에게 이 시기는 성장의 때이기도 하였다. 1837년부터 41년까지 (아마도 마리와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집필한 산문, 음악학도의 편지(Lettres d'un bachelier ès musique)에서 리스트는 자신이 머무르던 곳의 이야기 뿐 아니라 예술에 관하여, 또한 예술을 다루는 자신의 모습에 관하여, 또한 자신이 방문한 곳에서 예술을 사유하는 모습까지 반추하였다. “예술가의 운명은 슬프면서도 위대하다”는 리스트의 말은 자기 예언적인 발언으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리스트가 본 이탈리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리스트가 이탈리아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곡한 <순례의 해 2년, 이탈리아(Années de pèlerinage – Deuxième année – Italie [S161])> 각각의 곡명을 살펴보면 리스트가 이탈리아의 예술에 상당히 빠져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례의 해 1년, 스위스(Années de pèlerinage – Première année – Suisse [S160])>가 대부분 자연환경과 장소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
1.
혼례(Sposalizio)
2.
생각하는 사람(Il penseroso)
3.
살바토르 로자의 칸초네타(Canzonetta del Salvator Rosa)
4.
페트라르카 소네트 47번(Sonetto 47 del Petrarca)
5.
페트라르카 소네트 104번(Sonetto 104 del Petrarca)
6.
페트라르카 소네트 123번(Sonetto 123 del Petrarca)
7.
단테를 읽고 – 소나타풍 환상곡 (Après une lecture du Dante – Fantasia quasi sonata)
마리 다구와의 도피 생활 초기인 1837년,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코모에 도착한 리스트는 그곳에서 몇달간 머물렀다. “두 연인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위한 장소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코모 호숫가를 선택하라”는 리스트의 말은 행복에 젖은 리스트를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리스트는 개버즘나무 아래서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리는 리스트와 자신의 관계를 베아트리체와 단테로 줄곧 비유했다. 심지어는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말이다. 하지만 리스트는 마리의 이런 시도에 대해 시인을 창조하거나 신격화 하는 것은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시인의 몫이라 일축하였다.
코모에 머무는 동안 리스트는 밀라노를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출판업자 리코르디가 리스트에게 자신이 소유한 라 스칼라의 박스석을 제공해준 덕분에 리스트는 수많은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고 파리의 오페라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리스트는 밀라노의 오페라 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 활동에 실망하였다. 리스트는 밀라노를 두고 “정치, 문학, 예술이 부재한 땅”이라 칭하였으며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낸 오페라들을 크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보인 것은 비단 리스트뿐만이 아니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해 오페라를 쓰느니 차라리 파리 시내 번화가의 구멍가게에서 후추나 계피 장사나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이탈리아 사람들의 음악 취향을 크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당시 라 스칼라에서 자주 공연되던 작품들이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카를로 코치아(Carlo Coccia), 루이지 리치(Luigi Ricci), 페데리코 리치(Federico Ricci) 등의 오페라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리스트의 비판이 완전 부당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물론 대중들의 취향이 예술적 목표를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특정 시대나 장소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바흐의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조차 “일반인용으로 출판할 작품이면 그대는 조금만 예술적이시고 되도록 설탕을 많이 넣으”라고 조언하지 않았는가? 리스트 또한 음악학도의 편지에서 자신이 대중적 요구에 순응해왔음을 고백하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리스트의 수많은 오페라 패러프레이즈 또한 “대중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밀라노에서 리스트는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의 선율을 바탕으로 작곡한 <청교도의 회상(Réminiscences des Puritains – Grande fantaisie [S390i])> (이후 리스트는 이 곡의 마지막 폴로네이즈 파트만 따로 떼어내 짧은 서주를 붙여 <청교도 – 서주와 폴로네이즈(I Puritani – Introduction et Polonaise [S391])>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와 더불어 다수의 오페라 판타지를 연주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명성을 쌓게 된다.
리스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때 벨리니는 이미 사망했으며, 로시니는 오페라 세계에서 은퇴했고, 베르디의 첫 오페라는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트가 가장 높게 평가한 오페라 작곡가는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이다. <라 스칼라의 회상(Réminiscences de La Scala [S458])>에서 리스트가 메르카단테의 오페라 맹세(Il giuramento)의 선율들에 더해, 리스트가 삼류 작곡가라 생각하던 리치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의 선율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메르카단테의 선율들을 곡의 절반이 지나서야 코믹하게 제시된 리치의 선율이 계속해서 방해하지만 종국에는 메르카단테의 것만 남아 곡을 마무리 하는 모습에서 리스트가 생각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적어도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들 중 리스트가 이 곡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은 없으니 즐거운 상상 그 이상도 아니지만 말이다. 리스트가 무슨 생각을 했던간에 그는 이 곡을 출간할 생각이 없었다. 바이마르의 자료실에 잠들어 있던 이 곡은 리스트가 사망한지 한세기가 지난 1986년에야 처음으로 녹음되었고 2004년에서야 출간되었다.
글 김민규 / 편집 이지호
김민규, ARTIST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