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민 / 꼬물꼬물꼬물 / 목판새김에 혼합재료/ 2025 / 각 22x75cm / 개당 1,400,000 (세트 4,000,000)
작가노트
나의 작업은 질감과 이미지의 단편으로 ‘생’의 흔적을 탐색하는 데에 있다.
평평한 면을 가로질러 파헤치고 그 주위로 두터운 안료를 쌓아올려 만들어낸 거친 단면에는 모종의 쾌(快)가 있다. 빈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의 즐거움에 앞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남길 때와 같은, 일견 파괴적인 쾌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적 정서일 것이다. 파괴라 하면 어감이 퍽 강렬하다. 대신에 흔적을 남긴다 하면 어떤가. 그것도 봄이 오면 녹고 마는 눈에 남기는 족적이 아니라 영구히 남을 수 있는 흔적이라 하면, 이는 곧 생(生)이자 활(活)이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나에게 이러한 생활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부터 이어지는 작업은 1만 미터 하늘 위의 성층권에서도 선명한 밭고랑과 드문드문 놓인 지붕들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이름도 생김새도 인종도 모를 (그러나 인간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흔적과 자취의 표상이다.
오랜 세월 반복되었을 노동을 통해 무지(無地)의 땅에 아로새겨진 누군가의 삶이, 지난 5년간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고자 했던 나의 작업과 맞닿아 있었다. 기억은 곧 삶의 기록으로써 생을 이룬다. 특정 개인이 아닌 불특정적 복수의 삶과 생존을 위한 행위에서 발견한, ‘새김’으로써 일맥상통하는 형태적, 의미적 쾌는 내가 기꺼이 그것에 동참하여 그들의 기억과 땅의 흔적을 목판 위로 끌어오게끔 하였다. 황량한 벌판에서마저 드문드문 보이는 논밭과 지붕들에, 무한한 자연의 압도감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하여 빌붙는 그 징그러운 생활력에는 기묘한 애정마저 차올랐다.
새김은 기억의 증거이자 쾌로이다. 나뭇조각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탈락시키고 나는 나의 심상을 채워나간다. 충동과 계획의 사이에서 거듭 칼질을 한다. 판면에 결핍이 늘어갈 때마다 가슴 속이 꽉 차오르는 감각이 있다. 몰두하고 반복하며 새겨넣은 증거와 단서들은 구체적인 형태보다 단순한 선의 새김과 면으로 중첩되는 구성으로 화해, 선면의 대비감과 더불어 파내고 쌓는다는 정반대의 행위를 통해 생활감을 불러낸다. 이처럼 역설적인 형성의 과정은 평면의 구도를 요철이 드러나는 기법으로 재현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관조하듯 넘겨다보는 부감시의 서술적 속성에서 벗어나 새김의 형식으로 개입한 깊은 관심은 저 먼 땅의 감촉을 생생하게 조각한다. 그리하여 영구한 자연 속 아등바등 버티는 존재를 알리는 흔적은 목판 위에서 반복적으로 교차되고 엮이는 행위와 형상으로 드러나고, 나아가 ‘내’가 남길 생의 흔적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