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목소리
함승희 / Watering blue / 천, 염소계 표백제, 아크릴, 와이어, 솜, 펠트지/ 65.6x91 / 2025 / 미판매 / 웹 커버로 사용
함승희 / Blue - green / 천에 유화 / 34.4x34.4 / 미판매
작업노트
1.
나는 의식하기 힘들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러한 것이 내 의식의 지향성, 나의 행동,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바로 그 잠재의식의 영역에 다가가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이 과정을 유도하는 신호가 바로 그 영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정의 흔적이며, 이 감정들은 불분명한 영역에 잠재된 그것과 닮은 요소를 현실에서 마주할 때 깨어난다.
사진첩 속 갓난 아기인 나를 둘러싼 다양한 무늬의 이불들, 혹은 할머니 집 장롱 속에 오래 보관된 이불이나 길가에 버려진 낡은 이불을 마주할 때면, 지금은 완전히 단절되어버린 나의 영유아기 - 특히 그 시절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머니-를 향한 노스텔지아와 상실의 아픔이 고개를 든다.
이렇듯 해결되지 못한 채 억압되어 있던 과거의 정서를 외부로 이끌어낸 잠재의식은, 그것을 완전히 다른 맥락 안에서 반복적으로 재체험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정서로 변형시켜나간다. 나의 작업에서는 유아틱한 무늬의 천들을 락스 칠과 손세탁을 통해 퇴색시키는 행위가 이러한 재체험의 방식이 된다. 그리고 그 천들을 이용해 재현성과 추상성이 결합된 새로운 형상을 지어나가면서, 이유 모를 공허함의 늪 같았던 과거의 감정은 점차 창조의 샘으로 변모한다.
2.
나는 다섯 살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닮은 면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시도해왔다. 이런 무의식적인 욕구를 자각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너의 소묘는 엄마의 소묘와 많이 닮았어”라고 말해주신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있던 구멍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나에게 천 작업은 ‘엄마와 닮은 점을 찾고자 하는’, 더 나아가 ‘엄마가 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옛날에 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적어도 천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어머니와 다시 연결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을 만지고, 그것의 틈새를 바느질해나가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다. 더 나아가 바느질을 하는 그녀의 손길과 동작 속에 담겼을 감정을 몸으로 감각한다. 이는 마치 내가 엄마가 되어보는 듯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내 안에 있는 결핍을 채우고 회복하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3.
개인의 내면에는 저마다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 그림자는 바라보지 않으면 점차 짙어져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아직 인정되지 못한 자아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림자가 더 짙어지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직면하여 나의 일부로서 통합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에겐 작업이 곧 이 과정의 실천이다. 내게 예술은 상처와 불안을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전이 공간이자, 무의식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변형시켜나가는 실험의 장이다.
다섯 살에 어머니와 이별한 뒤 상실감과 그리움을 품어온 나는, 불분명한 감각적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어머니의 존재를 섬유 작업을 통해 더듬는다. 결국 나에게 바느질은 한때 천을 다뤘던 어머니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끈이자, 지금은 완전히 단절되어버린 모녀간의 연결을 상상 속에서 이어주는 제의적 행위기도 하다. 더불어 유아틱한 무늬의 천을 퇴색시키는 행위는 단절된 영유아기를 애도하는 나만의 방식이며, 그 기억을 현재의 감각 속으로 다시 불러내는 의식처럼 작동한다. 마침내 그 퇴색된 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상을 지어나감으로써,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과거의 아픔을 점차 다른 감정으로 변모시킨다. 그 과정에서 상실은 단순한 결핍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변환된다.
4.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요소들은 의식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다. 대신 이는 어떤 상징, 단편적 이미지, 감각적 단서, 모호한 분위기와 같은 추상적 형태로 ‘우회하여’ 귀환한다. 이러한 귀환의 과정은 외부의 특정 대상과 마주하여 무의식 안에 잠재된 요소와 공명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향을 맡거나 노래를 들었을 때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렇게 내면에서 떠오른 무의식의 파편들과 그것과 공명하는 외부의 대상들을 ‘주워와’ 이를 조합하여 전혀 새로운 형상을 지어나간다. 이는 마치 해변을 걷다가 눈에 들어온 조개껍데기, 파도에 쓸려와 해안선에 박힌 부식된 잡동사니들을 주워와 전혀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과 같다. 여기서 ‘파도’는 무의식의 움직임과 닮았다. 어떤 사물이 잠시 바다에 버려졌다 마침내 육지 위로 밀려 올라오는 것은 내가 언젠가 보거나 경험한 것들이 잠시 잊혀졌다 불현듯 다시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나는 그 바다와 육지 사이에 있는 해안선을 걷는 사람이다.
나는 의식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무의식의 경계에 서있다. 바다에서 쓸려온 잡동사니를 관찰하는 여느 수집가처럼 의식의 층위로 밀려들어오는 무의식의 잔재를 관찰한다. 이 잔재는 외부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목격하거나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다양한 정서의 형태로 떠오른다. 이를 통해 나는 내 무의식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특히 나를 작업하도록 이끄는 무의식의 정서는 ‘지나가버리는 시간’ 앞에서 느끼는 슬픔이다.
머릿속에 그려진 해변가의 조개껍데기와 잡동사니들, 나의 시선을 붙잡은 어느 폐가 창고에 버려진 이불, 사진 속에 담긴 갓난아기 시절의 나. 이 모든 것들은 지나가버린 시간이자, 한때 존재했던 무언가의 흔적들이다. 나는 이 흔적을 향하여 슬픔을 느끼는 동시에 애착을 가진다. 그렇기에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수집하여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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