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목소리
김가은 / 습관 / 캔버스에 유채 / 신한110-442-069440 / 81 x 58.5cm / 2021 / 1,200,000
희석되고 지나가는 시간 중에 붙잡아 길게 늘어놓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 그 순간들이란 누군가의 공허를 보았을 때다. 마른 진흙이 건들면 후두둑하고 부서지듯, 으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아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과 사람들이다.
요즈음 그 대상은 주로 할머니이다. 평생을 천진하게 살아온 우리 할머니. 치매로 기억이 파편처럼 흩어진 우리 할머니. 해 질 녘 허공을 응시하는 할머니의 눈과 거실을 녹진한 노란빛으로 물들이던 노을과 그 사이를 유영하듯 내려앉던 먼지들. 그 순간을 숨을 참듯 지나가는 시간을 꾹 누르며 바라보곤 했다.
김가은 / 무제 / 캔버스에 유채 / 신한110-442-069440 / 90.9 x 72.7cm / 2025 / 1,200,000
김가은 / 침상 / 캔버스에 유채 / 신한110-442-069440 / 130 x 194cm / 2025 / 3,000,000
작업은 존재와 공허가 맞닿아 있는 일상의 틈을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나에게 공허란 단순한 결핍이나 부재가 아니라 존재를 직면하게 만드는 감각의 통로다. 무언가가 사라졌거나 사라질 듯 위태로운 순간, 오히려 존재는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감각이 작업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의 근원이 되며 존재와 공허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이중적인 감정으로 얽혀 있다. 그렇기에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감상자의 상실과 기억에 따라 달리 떠오르는 형상이다. 누군가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고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긴장과 감각을 담아내기 위한 형상으로 잠자는 사람을 택해왔다. 자는 이의 의식이 꺼진 채 중력에 몸을 맡긴 모습은 살아 있으나 외부와 단절된, 무방비하고 고요한 상태다. 이 형상이 품고 있는 침묵과 긴장 속에서 미약하나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그의 온기. 그 순간의 온기를 붙잡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사실상 내가 잠자는 사람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였다. 가장 거리가 가까운 가족들이 그 대상이 되었고 일상 속에서 포착한 그들의 자는 모습을 기록했다.
그림을 보는 이의 시선 속에서 감정과 감각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전이되기를 바라며 단순한 재현을 피하고자 한다. 나는 그 장면을 마주했던 순간의 공기와 정적, 공간의 색감, 실존하는 육체의 무게감을 느낌의 층위로 옮기려 한다. 재료는 주로 한국화 재료를 사용하며 여러 겹의 장지는 많은 양의 재료를 품어내며 화면에 특유의 밀도와 무게감을 부여한다. 바탕에는 호분을 여러 층 덧발라 깊이 감 있는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형상을 쌓아간다. 이처럼 단단하게 구축된 신체의 밀도와 반대로 여백 속에 희미하게 스며드는 번짐의 대비는 인물의 존재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는 회화가 작가의 감정을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라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공감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작품을 마주한 이들이 각자의 상실이나 기억을 꺼내보는 순간 그 자체로 서로 다른 삶을 이어주는 접촉면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종종 억제되거나 지나치게 쉽게 소비된다. 나의 작업을 통해 미처 마주하지 못한 감정의 결들을 다시 꺼내어 바라보게 하고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시각의 전환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