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목소리
이진희 / 무제 / 캔버스에 과슈, 시온물감 / 41x32 / 2024 / 100,000
이진희 / 무제 / 캔버스에 과슈, 시온물감 / 35x27 / 2024 / 100,000
이진희 / 매미 / 캔버스에 혼합재료 / 90.7x90.7 / 2024 / 350,000
이진희 / 개구리 / 캔버스에 과슈, 시온물감 / 91x116.5 / 2024 / 550,000
금번 출품되는 작품들은 순수와 폭력성을 주제로 ‘나’와 사회, 그리고 타인을 인식한다.
작품들은 나의 어릴적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다.
매 계절마다 찾던 나의 시골은 당시 인터넷이 없는 깡촌으로 노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나는 가족, 친척들과 곧잘 놀러나가 계곡이나 산,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초여름에는 잠자리가 날고, 개구리가 논밭을 뛰며 마루에는 매미가 두 마리씩 붙어 울었다. 그러면 나는 채집통에 벌레를 잡아넣고 잊어 말려죽이거나 개구리를 주물럭거리다 다리를 부러트리곤 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 채집통을 본 할아버지께서 가볍게 책하시고 나는 충격에 빠진다. 시골에서 보냈던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이다.
과거의 나는 환경에 영향을 덜 받았으므로 가장 순수하고 온전하며, 채집통 속 말라죽은 매미로 또한 폭력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규정 이전에 존재하므로, 채집통 바깥의 눈이 그러한 '나'와 관람객을 재현하며 자아성찰의 과정을 모두 본다.
나의 과거 경험처럼 만약 소통이 관계의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라면, 소통은 폭력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업 <개구리>는 소통의 본질과 경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작품 속 시온물감에 가려진 개구리는, 타자성을 지니면서도 소통의 과정에서 '나'가 되기도 하는 경계에 선 존재로 등장한다. '나'는 나 혹은 타인에 관해서 얼만큼 알고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신체와 의식은 환경과 흐름에 의해 끊임없이 재인식된다. 나는 그러한 인식을 구조화하며 정의내릴 수 있는 행위가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소통은 언제나 자발적 참여로만 이루어지지는 않고, 재인식된 사실은 '나'에게만 고유하다. 작품의 주요 매체로 사용된 시온 물감은 열에 반응하여 고온에서 투명해지는 성질을 띄며,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 혹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특정한 계기에서 드러나는 과정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