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모든 관계에는 흔적이 있다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나는 태어남으로써 누군가의 자녀가 되었고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으며 누군가의 연인이 되었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했고 웃음의 대상도 되었다가 또 누군가를 울리는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관계는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주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 끊는 모든 행위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들 중에 집착, 외로움, 공허함, 질투와 시기 등은 내게 중요한 키워드로 다가온다. 발끝을 살짝 적신 줄 알았는데 어느덧 심장까지 잠겨오는 이 관계의 흔적들은 오랜시간 나를 괴롭혀 왔다. 맹수의 습격에 대비하여 목을 늘어뜨리고 편히 누워 자지 못하는 기린처럼 항상 불안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이것들(집착, 공허함, 질투와 시기)은 태평한 행복을 경계하게 하는 필수적 요소이자 운명이라 느낀다. 관계라는 개념에 대해 사유하며 쏟아내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이 흔적들은 어디서 묻어나오는가?’, ‘인간은 무엇을 맹수라 여기고 경계하는가?’ 에 대한 해답을 찾고 개운해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해답을 찾는다 해도 과연 나는 저 흔적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관계의 흔적에 태연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적응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데에 집중하고 있다.
〈집착의 미(美)〉**는 인간관계에서 느꼈던 집착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주하며 그린 첫 번째 작업이다. 관계에 지쳐가던 어느 시기, 나는 눈으로 상대를 따라붙고, 입으로 애써 안심을 구했다. 시선은 통제를, 말은 확인을 갈구하며 그 감정의 실체를 시각화했다.
눈과 입은 각각 꽃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빛을 받으며 피어나는 모습은 억눌렀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해방감을 상징한다. 집착이라는 감정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며, 그 안에서도 스스로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해 이상적인 관계 속에서도 불완전한 감정들은 공존함을 인정하고자 한다. 이는 곧, 감정을 외면하기보다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치유의 첫 걸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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